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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GAM People] 영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동티모르로 이어지는 기술, 그 따뜻한 이야기
  • 작성자홍보팀
  • 작성일시2015/03/31 15:18
  • 조회수923

영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동티모르로 이어지는

기술, 그 따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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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지질조사소는 당시 영국의 지질조사소(BGS, British Geological Survey)로부터 지질학 관련 최신 기술을 전달받았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동티모르에 있는 지질학자들에게 우리의 기술을 전달할 만큼 대한민국의 지질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국지질조사소의 도움이 컸듯이 이제는 우리의 기술을 다른 나라의 기술성장의 밑거름으로 나누고 있다. 영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동티모르로 퍼져나가는 기술의 따뜻한 이야기. 동티모르에서 기술이전에 힘쓰고 있는 최위찬 박사와, 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리드만 박사를 만나 그 따뜻한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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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위찬 박사 인터뷰>

 

                  ▲ 동티모르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최위찬 박사.

 

Q.1 처음에 동티모르행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동티모르에 가야겠다고 결정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른 일을 염두해 두고 있던 터라 결정을 하는 데 많은 고민을 했죠. 단 하나, 그곳 학생들에게 했던 약속을 키기 위해 동티모르행을 결심했습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컸습니다."

 

Q.2 처음 방문했을 당시 동티모르의 지질조사 수준과 지질조사 교육과정은 어땠나요

"물론 지질조사 수준이 많이 열악할 것이란 예상은 했습니다. 하지만 지층을 측정할 줄도 모르더군요. 인도네시아에서 지질학을 이수했거나 포르투갈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고 들었는데 제가 보기엔 우리나라 대학으로 친다면 지질학과에 갓 들어온 신입생 혹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 같았어요. 동티모르 지질학과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죠. 이 나라엔 4년제 대학교가 단 하나뿐인데 2011년이 돼서야 지질학과를 처음 개설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막막하더군요. 지질조사를 다닐 땐 차 한 대에 기사, KIGAM 2, 통역, 현지인까지 5명이 타고 비포장 도로 같은 험지를 돌아다녔습니다. 차량 고장이 잦았죠. 정글에서는 칼로 숲을 쳐내 길을 내며 가야하기도 했고요. 저녁에는 숙소에 모여 그날 조사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때론 동티모르 학자들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모조지를 수십 장 사서 차 벽에 붙여놓고 필요할 때마다 강의를 하곤 했죠."

 

Q.3 교육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대학에 지질학과 자체도 없었고 우리나라처럼 지질 전문 연구원도 없었죠. 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KOICA의 공공수탁 사업을 시작하게 된 후 동티모르측에서 8명의 인력을 뽑았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죠. 그러나 지금은 모두 자체 지질조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이곳 연구소 소장이 된 사람도 있어요. 정말 엄청난 발전이죠. 지질조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 지원도 큰 몫을 했습니다. 도면, 컴퍼스, GPS, 루베 등 개인장비 외에도 지질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PC, 8천만 원 상당의 현미경, 광물 원석을 알아보는 SRF 장비 등이 지급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정말 많은 발전을 했죠. 덕분에 KOICA에서 성공사례 1순위로 뽑혀 전 세계적으로 두 명만 주는 상을 작년 말에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습니다."

 

▲  지질조사 다닐때 차 한대에 5명이 타고 비포장도로나 산지를 돌아다녔다.

 

Q.4 동티모르에 계시는 동안 느낀점과 잊지 못할 추억담이 듣고 싶습니다.

"사실 이곳 학생들의 수준이 아직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체 능력으로 지질조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력은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떠나기 전까지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이곳에 와서 많이 고생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추억으로 남을 만큼 보람되고 기뻤던 적도 여러번 있었죠. 부임 후 일리마노 지역에 있었을 당시 우달브라는 직원과 크로마이트라는 광산 조사를 했습니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줄자를 이용해 측정하면서 광산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배태되어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죠. 결국 관련 개념들을 이해하더니 그 후 스스로 혼자 시도를 해서 성공을 했더군요. 너무 기쁜 나머지 맥주 한 박스를 선물했습니다. 생각할수록 흐뭇합니다."

 

Q.5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 1970년대 초,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국립지질조사소였을 때 우리 역시 영국에서 기술 지원을 받는 입장이었죠. 세월이 참 많이 흘렀고 연구원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예전에 비해 많이 발전되었죠.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부서 간의 협력과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부서 간 공동사업을 통해 자연스러운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좋은 연구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무엇보다 우리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는만큼 연구원들 스스로도 자부심을 갖길 바랍니다."  

 

 

<안토니 리드만(Antony Reedman) 박사 인터뷰>

 

▲ 1970년대 한-영 광물탐사단으로 한국을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도 KIGAM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리드만 박사.

 

Q.1 당시 한-영 광물탐사단의 목적과 박사님께서 한국에 오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영 광물탐사 프로젝트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충청북도 황강리 지역의 지질 및 광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것과 당시 한국지질조사소(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구자들에게 최신 탐사 기술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영국 정부에 기술적 지원을 요청했고 이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죠. 당시 국제부서의 일원으로 아프리카에서도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한국에서의 프로젝트 참가자 중 한명으로 뽑힐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아시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Q.2 1970년대 한국에서의 생활과 문화가 어떻게 느껴지셨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의 1인당 GDP300달러 이하였고 UN이 분류한 세계 최빈국 50개 국에 속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오늘날 이렇게 놀라운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뤄낸 것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서울 아파트에서 생활할 당시 통금시간이 기억에 남네요. 통금시간이 저녁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였던 걸로 기억해요. 통금시간에는 정말 조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 4시가 되면 전자음으로 교회 종소리가 들리곤 했어요또한 저는 한국 동료들을 보며 한국사회에 대해 배워야했습니다. 한국사회는 독립보다는 가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더군요. 결혼을 한 후에도 한 집에서 부모와 같이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모습들은 사실 그 당시 저에겐 낯선 풍경이었죠."

 

Q.3 1970년대, 한국지질조사소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지질조사소에 대해서 사전조사를 했습니다만, 실제로 와서 보니 현실은 다르더군요. 지질학자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교육 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질조사를 실시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용산 미군기지 근처 남영동의 1층짜리 작은 건물에서 일을 했는데 사무실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복잡했죠. 설상가상으로 경부선 철도 부근에 자리하고 있어서 소음이 심했는데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스펙토그래프의 분석결과가 엉망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장비 수준도 좋지 못했는데 업무에 써야 할 장비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서양 국가들의 지질조사소 환경과 비교해봤을 때 한국지질조사소가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Q.4 당시 현장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합니다.

"현장작업 역시 힘든 점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지질학자들에게 현장에서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지질조사소에서 이용할 수 있는 차량이 없어 거의 모든 조사를 발로 뛰어가면서 했죠. 이동할 차량이 있어도 도로가 거의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어 차를 배에 싣고 건너기도 했죠. 지도도 정확하지 않았고 GPS도 없었기에 위치 파악도 더뎠지만 계속 걸어 다닌 덕분에 조사 지역을 더 잘 알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현장조사는 힘들었지만 흥미로웠고, 한국의 다른 측면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당시의 현장조사가 한국의 연구를, 특히 한국의 지질조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를 얻었고 그 많은 성과들은 당시 한국지질조사소 직원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한 열망이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 청평 한강 나루터에서 연락선으로 우마차와

한-영 광물탐사단이 사용하는 landrover를 싣고 가는 모습(1971)

 

Q.5 함께 일했던 연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당시 한국 연구원들이 그들만의 지질학 이론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일 먼저 그들이 질문을 하게끔 유도했죠. 현장이나 대학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며 상호작용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어떤 것이든 질문을 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이죠. 1970년대 중반쯤이 돼서야 분위기가 점차 바뀌더군요. 특히 많은 여성들이 지질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가르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을 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매우 긍정적인 변화였죠."

 

Q.6 오늘날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의 모습을 바라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한국이 발전하면서 KIGAM도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이 발전 과정을 대부분 지켜봐왔죠. 1975년부터 1980년까지는 매년 한국에 들어와 세미나도 열고현장견학도 KIGAM과 함께 했습니다. 그 이후 제가 BGS 국제부서의 장이 되고 2000, 정년퇴임을 하고 난 지금까지도 KIGAM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죠. KIGAM이 대전으로 이전을 한 후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연구소와 사무실의 크기, 규모도 매우 커졌고 타국의 어느 연구소와 비교해 보아도 훨씬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동아시아와 CCOP지역에서는 일본, 말레이시아 등과 함께 가장 굳건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질학에서 KIGAM을 모르는 나라는 이제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최신 기술을 갖추고 있는 기관일 뿐 아니라 현장 지질조사에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훌륭한 지질학자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는 기관으로 더욱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7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구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거 저와 같이 일하셨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동료들이 한국 지구과학계에 많은 기여와 공헌을 했다는 자랑스러운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젊은 직원 분들은 과거에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많은 업적들의 가치를 본받아 미래에도 선배님들 같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본 콘텐츠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인 <지질·자원·사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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